요즘 미래 사회를 그린 영화들을 다시 살펴보고 있는데, 불현듯 생각난 레디 플레이어 원.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영화관에서 보기까지 했는데 평이 엄청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가볍게 보기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이런 거 좋아하면 약간 아는 캐릭터 찾는 맛에 볼만하긴 한 듯. 게임 플레이 하는 거라 눈이 즐거운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온갖 팝 컬처 레퍼런스와 화려한 시각 효과가 시선을 사로잡으니까요. 사람들은 가상세계 속에서 자신을 새로 만들고, 현실에서 하지 못한 걸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는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인간의 감정과 혼란, 그리고 기술 속에 묻혀버린 자아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스필버그가 그린 메타버스 세상 오아시스
배경은 2045년. 지구는 많이 망가졌고, 사람들은 일상의 대부분을 오아시스라는 가상 공간 안에서 보냅니다. 오아시스는 게임 플레이만 가능한 세상이 아니라 학교도 있고, 일자리도 있고, 친구도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입니다. 현실보다 훨씬 자유롭고, 더 많은 선택지를 주는 공간이죠.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점점 현실보다 이 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지금 우리가 SNS나 가상 플랫폼에 의존하는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예전에 이런 비슷한 큐플레이나 해피시티 조이시티 같은 서버들이 있던 게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초반 자동차 레이스 장면은 긴박함이 살아 있어 보는 맛이 있습니다.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속도와 움직임, 무중력 같은 장면들이 쉴 틈 없이 이어지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은 갈망이 이 장면들에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술은 탈출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진짜 삶을 뒤로 미루는 핑곗거리이기도 합니다.
오아시스는 분명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하지만 편리함 뒤에는 항상 문제가 있기 마련이죠. 점점 현실에서의 책임이나 관계를 놓게 되는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가상에서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점차 현실을 회피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은 지금 우리 삶 속에도 슬며시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디지털로 도망치는 동안, 진짜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으니까요.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웨이드는 오아시스 속에선 대단한 존재지만, 현실에서는 조용히 살아가는 청년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모험처럼 보이던 여정이 결국 자신의 정체성과 책임을 마주하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에 그는 오아시스에서 사는 것을 멈추는 선택을 합니다. 일주일에 이틀은 서버를 끄는 결정, 디지털 디톡스를 본인 스스로 하려고 결정한 것은 칭찬해 줄 만한 일입니다.
AI사회에서 감정은 어디서 사라지는가
오아시스라는 공간 안에서는 아바타가 곧 나 자신이 됩니다. 누구나 캐릭터를 새롭게 만들 수 있고,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웨이드는 파시벌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아르테미스라는 캐릭터와 연결됩니다. 둘의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상 공간에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가상세계에서 이뤄진 관계이지만 현실에 실존하는 사람의 감정으로 대하는 거니까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도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 누군가와 친해지고, 사랑을 느끼는 일들이 흔합니다.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과도 깊이 연결되는 일이 가능한 시대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연결된 감정은 어디까지 진짜일까요. 영화는 이 부분에 확답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사라지는 가상의 감정들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조심스럽게 보여줍니다.
아르테미스는 웨이드에게 네가 날 다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외모나 목소리, 멋진 대사 뒤에 숨겨진 진짜 감정을 건드릴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기술은 감정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AI가 공감하는 것처럼 말하고, 표정을 따라하고, 감정 섞인 목소리를 내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됐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흉내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진짜 이해한다는 건,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말하지 않아도 느끼는 감각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웨이드와 아르테미스가 가까워지는 과정은 그 복잡함을 담고 있습니다. 서로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관계. 그런 관계는 시간이 걸리고, 조심스럽고,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지나야 진짜 감정과 더 깊은 유대감이 만들어집니다. AI는 따라 할 수 있어도, 그 깊이까지는 닿지 못합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 비춘 우리의 자아
가상세계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냅니다. 더 용감하고, 더 아름답고, 더 똑똑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현실에서는 말 한마디 꺼내기 어려운 사람이 가상에서는 리더가 되고, 존재를 드러냅니다. 웨이드 역시 그런 자아를 통해 용기를 얻고, 세상과 마주합니다. 그렇다고 가상 자아가 현실을 대체할 수 있을까요. 메타버스는 자아의 실험실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새로운 나를 시험해볼 수 있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죠. 하지만 그 자아가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순간,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나는 어디에 있고, 지금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지 인지를 해야 정신 건강에 더 이로울 것입니다.
웨이드가 아르테미스를 현실에서 마주했을 때, 그녀가 걱정했던 외적인 모습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해온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겉모습이 아니라, 함께 나눈 시간과 경험 속에서 천천히 만들어지는 거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겉모습이나 꾸며진 캐릭터로만 보는 것이 아닌 내면을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서, 영화가 현실을 제대로 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시대의 현실에서는 자아에 대해 너무 많은 정의를 요구합니다. 어디에 속해 있는지,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끊임없이 다양한 질문과 다른 사람의 시선에 평가받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더 피곤해지고, 더 혼란스러워지죠. 레디 플레이어 원은 그런 시대 속에서 진짜 나를 다시 찾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웨이드는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자아를 만들든, 결국 그 자아에 책임을 지는 건 나 자신입니다. 내가 선택한 모습대로 살아갈 때, 비로소 그 자아가 진짜가 됩니다. 영화는 가상에서도 진짜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전제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웨이드는 오아시스를 사랑하지만, 현실의 본인도 제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레이싱게임이나 화려한 효과들로 눈이 굉장히 즐거운 편입니다. 그렇지만 핵심 내용만 따지고 보면 가상세계, AI, 현실 자아 바라보기 등 꽤 교훈적이고 지금도 받아들여야 하는 뜻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입니다. 어떤 자아로 살아갈 것인지, 어떤 현실을 선택할 것인지. 이제 개인 하나하나가 브랜드로써, 셀프 브랜딩을 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들 말하는데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면 그 사회를 더 일찍 예견하고 있습니다. 미친 속도로 발전해 나가는 기술을 보면 현실에서 어떤 판단 기준을 가지고 중심을 잡고 있을지가 굉장히 중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