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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음악 영화 하면 생각나는 것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비긴 어게인은 뉴욕을 배경으로 삶이 어긋난 두 사람이 음악을 통해 다시 일어나 삶을 새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다시 어떤 형태로든 삶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주인공과 그 주변 스토리로 보여줍니다. 모든 것이 잘 흘러가던 시간은 지나가 버렸고 누군가는 음악을 잃고 누군가는 사랑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겪은 두 사람은 점점 감정을 공유하고 서로 힘이 되어 자신을 다시 조립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실의 흔적을 극복해 나가며 아름다운 음악까지 들려주는 영화였습니다.
공허를 가져온 상실의 순간
그레타는 오랜 시간 함께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던 연인과 뉴욕으로 이사왔습니다. 잘 모르는 낯선 도시에 기대는 것은 오직 연인과의 관계 하나뿐이었지만, 음악 활동이 점점 내 이름은 사라지고 남자친구 데이브의 이름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관계도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레타는 점점 연인의 세계에서조차 밀려나는 느낌을 받으며, 자신이 만든 음악마저 데이브의 사람의 작품처럼 만들어지는 순간들을 겪게 됩니다. 자신의 이름은 사라진 새로운 음반 계약이 체결되고, 그가 무대에서 다른 여성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순간 그레타는 자기가 이 도시에 왜 와 있는지조차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혼란과 배신감 속에서 방황하며 자신이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방 하나 없는 상황이 되어 친구의 소파 위에서 잠을 청하며 그녀는 매일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한편 댄은 한때 이름을 알렸던 음반 프로듀서였습니다. 트렌드에 발맞춰 가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시대가 원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그의 방식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였고 회사 동료들조차 그를 점점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회사에서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가정에서도 아내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딸과도 대화가 잘 되지 않았고 오랜만에 만나도 각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며 식사를 마치기 일쑤였습니다. 가정에서 느끼는 고립감은 일터에서의 실망감과 맞물려 점점 더 큰 무기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때 열정을 가졌던 음악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 같은 허탈함 속에서 매일을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마주친 곳은 무대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소규모 바였습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 노래가 묻힐 정도였고 음악은 그저 배경음악이었기에 분위기는 산만했습니다. 친구가 노래 잘하지 않냐며 억지로 마이크 앞에 세운 그레타는 작고 수줍은 목소리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시작합니다. 긴장감이 묻어나는 행동을 보여주면서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엿보였습니다. 그날 밤 관객 대부분은 배경음악처럼 넘겼지만 댄은 그레타의 노래에 집중하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가사 하나하나가 감정을 담고 있었고 멜로디는 날것처럼 들렸습니다. 그 순간 그는 무언가 빠르게 되살아나는 걸 느꼈고 한때 잃어버렸던 직감이 다시 꿈틀거리는 듯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노래에 새로운 선율을 섞어 드럼과 베이스가 따라오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느끼지 못했던 음악에 대한 애정과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댄은 곧바로 그레타에게 말을 겁니다. 낯선 사람의 접근에 경계하기도 했지만 댄이 노래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열정을 보고 조금씩 마음을 풉니다. 그리고 둘은 스튜디오도, 자금도 없이 앨범을 만들기로 합니다. 복잡하게 흘러가던 기존 음반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지만 두 사람 이 선택을 고수해 나갑니다. 서로 믿어주는 신뢰관계가 되어 가능성을 새로 바라보았습니다.
도시의 소음 위에 겹쳐지는 음악
두 사람은 정해진 장소 없이 도시 곳곳을 녹음실 삼아 앨범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공원의 벤치, 지하철 통로, 건물 옥상,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까지 모든 장소가 그들의 무대가 됩니다. 거기엔 자연의 바람 소리, 거리의 잡음, 자전거 바퀴 굴러가는 소리까지 그대로 담겼습니다. 복잡한 도심 소리가 녹음되어도 그자체가 감성이라며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소음은 두 사람에게 영감을 주기 시작합니다. 자동차 경적이나 아이들의 웃음소리, 바람 소리조차도 녹음의 일부가 됩니다. 댄은 현재 있는 공간 그대로를 살리는 방식으로 곡을 완성합니다. 완벽한 음정보다는 실제 일상 속이 섞인 소리를 활용합니다. 그레타의 노래들은 그녀가 겪어온 일을 있는 담고 있었습니다. 데이브와의 이별을 겪으며 썼던 곡에는 그가 변해버린 이유보다 자신이 그 안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한 감정이 들어있습니다. 짧은 가사 안에 오래된 관계가 얼마나 무너졌는지가 드러나고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더 진실되게 다가옵니다. 댄은 그레타가 전달하고 싶은 방식 그대로 곡을 완성하도록 지지해 줍니다. 댄은 음악을 하면서도 오랫동안 소원했던 딸 바이올렛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했습니다. 바이올렛은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였고 그렇기에 더 아버지인 댄과의 대화는 대부분 짧게 끝나기 일쑤였습니다. 댄은 바이올렛에게 기타를 배워보자고 제안합니다. 손가락 끝이 아프다는 불평도 들렸지만 그동안 어색했던 둘 사이의 침묵은 기타를 통해 풀리게 됩니다. 녹음 세션 중간에 바이올렛이 참여하면서 앨범은 그레타와 댄 두 사람만의 작업이 아닌 주변 사람들도 함께 만드는 작품이 됩니다.
회복은 진심에서 시작된다
앨범을 다 만든 후 댄은 음반사에 이 작품을 가져가지만 상업적인 가능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합니다. 그들은 몇 곡을 제외하고는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댄과 그레타는 고민을 하긴 하지만 이 음악이 가진 진짜 매력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에 결국 다른 방식을 선택합니다. 그레타는 음반을 온라인에 직접 공개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플랫폼의 조회 수나 팔로워 수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이 만든 곡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몇 개의 클릭만으로 누구든 노래를 들을 수 있게 하고 싶어했습니다. 음악으로 얻은 수익을 따로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이 어떻게 그 음악을 듣는지, 그리고 음악을 만든 사람들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댄은 딸과 함께 길을 걷고 그레타는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떠납니다. 서로를 밀어주던 두 사람은 자신의 삶을 찾아 자연스럽게 각자의 길로 향합니다. 마주한 채 작별하는 장면은 설명도, 약속도 없이 그들의 감정과 관계가 어디까지 닿아 있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로맨스로 이어지지 않아서 더 뜻깊어 보이는 관계였습니다. 둘이 연인관계가 되었다 이런식이었으면 영화의 매력이 훅 떨어졌을 듯합니다.
실패와 배신으로 무너졌던 시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음악을 통해 자신을 다시 세우고 삶을 만들어나갔습니다. 둘 사이에 사랑이라는 말이 오가지는 않지만, 서로가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정도 다른 형태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신뢰 관계도 어떠한 사랑의 한 형태가 아닐까 합니다. 의미는 정립하기 나름이니까요. 언제나 감각적으로 보이는 뉴욕의 거리에 좋은 OST가 깔린 비긴어게인은 우리나라에서 꽤나 흥행하였습니다. 특히 LOST STARS는 지금도 노래방 팝송 순위에 있을 정도입니다. 실패나 실망이 있어도 누군가 믿어주는 한 두 명만 있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