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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신념을 조작한 시스템이 만든 거짓된 질서

by bluebasketb 2025. 3. 21.

설국열차 SNOWPIERCER 북미 버전 포스터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과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극한의 생존 상황이라는 배경을 활용해, 사회가 어떻게 인간의 신념을 설계하고 그것을 통해 지배를 정당화하는지를 봉준호 감독의 방식대로 보여줍니다. 시스템은 권력을 행사하는 기계적 틀이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을 조종하고, 그 믿음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굳어질 때까지 반복적으로 주입됩니다. 어느 나라나 시스템은 저렇게 만들어집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회사나 학교 같은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국열차는 그 주입된 신념이 어떻게 인간을 기계처럼 움직이게 만들고, 결국 인간성 자체를 마모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폐쇄된 열차 속 사회를 통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질서가 얼마나 취약하고 조작 가능하며, 동시에 얼마나 강력한 억압 도구가 되는지를 극단적 예시로 보여줍니다.

눈 덮인 세상, 닫힌 열차 안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설국열차는 지구를 뒤덮은 빙하기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류가 기차 안에서 생활하는 배경 스토리로 시작됩니다. 이 열차는 인간이 만든 최후의 문명이자, 폐쇄된 생태계의 축소판입니다. 겉으로는 질서 정연하게 유지되는 하나의 공동체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철저하게 분리된 계급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열차의 앞칸은 부유한 지배계층이 차지하고, 맨 뒤 칸은 생존을 허락받은 하층민이 밀집해 삽니다. 세계가 멸망하고 열차만이 남아있음에도 여전히 계급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 이들은 공간만 분리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자체가 분리돼 있습니다. 식사, 언어, 교육, 심지어 시간의 감각까지도 계층마다 다르게 작동합니다. 열차의 꼬리칸에 위치한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생존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곤충으로 만든 단백질 블록을 주식으로 삼고, 주기적으로 앞칸에서 내려온 군대에 의해 통제됩니다. 자녀는 이유도 설명받지 못한 채 끌려가며, 그 무엇도 제대로 저항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묵인과 체념이 일상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침묵이 단지 공포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 체계가 무너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두려움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그 두려움은 곧 순응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여기에 시스템이 만든 신념이 자리 잡습니다.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믿음, 윗사람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기대,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조용히 사람들을 마비시킵니다.

관객은 이 상황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질서 또한, 본질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고 주입된 것은 아닐까.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사회 구조나 질서의 언어는 정말 자연스러운가. 설국열차는 질문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후 전개를 통해 더욱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조작된 질서

영화의 주인공 커티스는 오랜 시간 억눌려 온 꼬리칸 사람들과 함께 혁명을 준비합니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싸우고, 앞칸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여정은 물리적인 진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믿고 있던 세계를 하나씩 깨부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열차의 각 칸을 지나면서 이들은 점점 더 복잡한 구조와 규율, 그리고 철저한 위선을 목격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혁명을 위한 분노였던 감정이, 점차 혼란과 회의로 바뀌게 됩니다. 믿음의 기초가 하나씩 무너져 내리는 순간, 커티스는 비로소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진지하게 되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이 여정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커티스가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길리엄이 사실상 윌포드와 공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는 길리엄을 혁명의 상징으로 여겼고, 그를 통해 희망과 방향성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그 혁명조차도 시스템이 설계한 것이었고, 정해진 시점에 인구를 줄이기 위한 조절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커티스는 스스로의 분노와 신념이, 실은 누군가의 계획 안에 있었음을 깨닫고 충격에 빠집니다. 이는 곧 인간이 스스로 진실이라 믿었던 가치가 얼마나 쉽게 조작되고, 체계에 흡수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더 나아가, 엔진의 유지에 아이들의 노동이 필요하다는 설정은 영화의 윤리적 중심을 관통하는 장치입니다. 열차는 멈추면 안 되고, 그래서 아이들을 부품처럼 이용해야 한다는 논리는,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과 희생을 합리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포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논리가 감정을 억누르고, 질서가 생명을 대체하는 지점에서, 인간성은 기계적 기능으로 전락합니다. 커티스는 이 상황을 직면하고 팔을 내어주는 선택을 합니다. 그는 생존자에서 구원자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와 세계 전체에 대한 반성을 실천으로 옮깁니다. 그 순간, 그는 질서의 틀을 유지하는 데서 한 발 물러선다.

영화는 끝으로 갈수록 명백해집니다. 우리가 믿는 신념은 진실일 수도 있지만, 아주 치밀하게 설계된 거짓일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그 거짓이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을 때,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곧 고통과 혼란을 수반한다는 점입니다. 설국열차는 이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고, 관객 각자가 그 질서 안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제가 있는 사회의 위치는 어디쯤일까요, 계급이 없는 사회라고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계급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세계를 멈추고 다시 시작하려면

결말에서 커티스는 더 이상 시스템 안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희생하고, 결국 열차는 탈선합니다. 이 장면은 비극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진정한 변화의 첫걸음이라고 봅니다. 진짜 혁명을 해내기 위해 필요했던 열차 탈선. 모든 것이 부서지고 무너진 이후에야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그 선택은 두렵고 불확실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길이든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눈 덮인 폐허 위, 살아남은 두 인물이 마주치게 되는 북극곰은 단순한 생명의 상징을 넘어섭니다. 아무런 생명도 남아 있지 않다고 알고 있던 곳에 북극곰이라는 생명이 살고 있는 사실을 마주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폐쇄된 시스템 밖에도 삶이 가능하다는 증거이며,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영화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뚜렷하게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열린 결말로 스스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기존의 거짓 위에서 계속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한 진실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설국열차는 열차 혁명 이후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단지 시스템을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선택과 책임, 그리고 변화의 불가피성을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질서 속에 있으며, 그 질서를 진실로 믿는가. 혹시 당신이 진실이라 여기는 모든 것이, 누군가가 설계한 신념은 아닌가. 신념이 거짓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눈을 뜨는 순간, 우리는 시선과 입장을 바꾸고 새로운 세상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빙하기가 찾아온 세상 속 하나의 열차 속 세상을 그린 설국열차.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와, 그 구조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길들여지고 있는지를 조용하지만 깊이 있게 성찰하는 작품입니다. 혁명과 거리가 멀어진 현대 사회, 다시금 혁명이 필요한 순간이 오고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