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보고 잊는 영화들이 많은 요즘, 이 영화는 보고 나서도 오래 머릿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행복이나 그런 느낌으로 오래남은 것은 아니고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케빈에 대하여는 특정 장르로 분류하기 어렵고, 누군가에게 쉽게 추천하기에도 조심스러운 작품입니다. 폭력적인 장면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다뤄지는 감정들이 워낙 낯설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사건보다 감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때문에, 보는 동안 마음 한쪽이 계속 눌린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그 찜찜한 감정이 계속 남습니다. 특히 평범한 일상의 틈새에 스며든 위태로운 공기가 자꾸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정신질환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 없는 표정
처음부터 케빈은 뭔가가 달랐습니다. 세상과 감정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고, 그 연결 고리를 의도적으로 끊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엄마를 볼 때 눈빛에 따뜻함이 없었습니다. 그건 분노도 애정도 아닌, 말 그대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요. 엄마인 에바는 그 느낌을 오래도록 혼자 감당해야 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마주하며 살아야 했던 거죠. 영화는 시간을 왔다 갔다 하며 사건의 배경을 하나씩 보여줍니다. 플래시백 구조를 통해 관객은 결과를 먼저 보고, 그다음엔 그 결과로 향하는 과정을 조금씩 따라가게 됩니다. 덕분에 케빈이 어떤 성향을 지닌 사람인지, 그리고 그런 성향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비교적 천천히 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단번에 판단할 수 없는 아이였고, 그래서 더 복잡한 감정이 생겼습니다. 장면 하나하나가 불편함을 만들지만, 동시에 시선을 떼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케빈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아니, 드러낼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떤 일에도 반응이 없고, 누군가를 다치게 했을 때도 무표정하게 행동합니다. 몇몇 장면에선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말보단 눈빛과 태도가 더 강렬했습니다. 팔이 부러졌을 때, 그걸 이용해 엄마를 통제하려는 모습은 단순히 문제가 있는 아이를 넘어서서, 공감 능력이 결여된 한 사람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그런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관객은 스스로도 불편한 감정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런 성향을 정신적인 문제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양육 환경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습니다. 진단하지 않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현실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실제로도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애쓰다가 지쳐버릴 때도 있잖아요. 이 영화는 그런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케빈을 바라보는 관객의 감정도 매 장면마다 달라지고 흔들리게 됩니다. 어쩌면 케빈은 선천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느끼기 어려운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정말 처음부터 외면을 배운 사람일 수도 있었겠지요. 영화는 어느 쪽이든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한 장면 한 장면이 오래 머물게 됩니다. 누군가는 케빈을 괴물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그렇게 쉽게 내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 숨어 있는 결핍을 천천히 드러냅니다.
도덕 불감증이 만든 불편한 일상
가끔 어떤 사람의 평범한 말투나 행동에서도 이상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설명은 안 되는데, 뭔가 불편한 기운이 감도는 그런 순간들. 케빈은 그런 느낌을 주는 아이였습니다. 식탁에 앉아 있을 때도, 동생과 장난을 칠 때도, 가족과 함께 있는 순간조차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겉으로는 평온한데,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이 늘 감돌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도 숨이 막히는 느낌이랄까요. 그가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느낌은 직접적인 행동보다 오히려 침묵에서 더 강하게 드러났습니다. 단어 하나 없이 눈빛으로 사람을 밀어내고, 아주 짧은 웃음으로 누군가의 불안을 더 크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던 이런 모습은 나중엔 예측 불가능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때 부모가 단호하게 대응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영화는 그런 기회를 조금씩 놓치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동생을 다치게 하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고, 그 상황을 오히려 기회처럼 이용했습니다. 부모가 더 신경 쓰는 대상을 찾아내고, 그 틈을 파고들어 자신에게 시선을 끌어오는 방식. 이런 계산된 행동은 어린아이의 질투심으로 보기 어려운 지점이 많았습니다. 오히려 성인보다 더 치밀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순간순간 그의 눈빛엔 무언가를 시험하고 있다는 냉정한 계산이 담겨 있었습니다. 엄마 에바는 이런 행동들을 인지하면서도 매번 혼자 판단해야 했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케빈을 믿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반응이 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현실에서도 이런 상황은 많겠죠. 부모 중 한 명만 이상함을 감지하고, 다른 가족은 평범하게 넘겨버리는 경우. 그럴 때 감정적으로 고립되는 사람은 늘 같은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때 생기는 결과는 너무나도 큰데 말이죠. 영화는 범죄 장면보다도 이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더 큰 긴장을 만듭니다. 아이가 문제를 일으켜도 그 사실을 아무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 엄마가 피로에 지쳐도, 감정이 소진돼도, 누구도 그녀를 대신해주지 않는 장면. 그것들이 쌓여서 마지막 사건이 벌어졌을 때, 관객은 단지 충격만 받는 게 아니라,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방치된 수많은 선택을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단서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동의 반사회성이 만들어낸 한 가족의 붕괴
가정이라는 건 아이가 자라는 공간인 동시에, 부모가 무너지기도 쉬운 공간입니다. 케빈이 보여준 행동들은 단순히 아이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점점 더 커지는 무표정, 반복되는 조롱, 엄마를 향한 노골적인 무시. 이런 행동들이 이어질 때마다 가족의 틈은 조금씩 벌어졌고, 그 안에서 가장 먼저 고립된 건 에바였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의 고립을 막아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아들을 믿고 싶었습니다. 어릴 때는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식으로 넘겼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에바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말해도, 그 감정을 오해로 치부했습니다. 그 결과는 남편이 에바보다 더 빨리 현실에서 사라지는 걸로 돌아옵니다. 결국 혼자 남은 에바는 케빈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무거운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영화는 에바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도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보여줍니다. 말이 없는 장면, 지친 얼굴, 비어 있는 표정. 그 모든 것이 감정 이상의 것을 전달합니다. 자녀를 책임진다는 게 어떤 건지, 그리고 그것이 무너지면 부모는 어떤 감정을 겪게 되는지를 너무 조용하게 그려냅니다. 어떤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깊은데, 이 영화는 그런 감정을 가만히 따라가게 만듭니다. 설명 없이도 통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이야기 끝에서 에바는 여전히 케빈을 마주합니다. 그가 저지른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복잡한 표정, 여러 겹의 감정이 섞인 눈빛. 거기엔 책임도 있고, 원망도 있으며, 어쩌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애정도 섞여 있었을 겁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는 거기 있었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감정이 전달됐습니다. 케빈에 대하여는 부모와 자식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끝나고 나서도 오래 생각하게 만들고, 쉽게 털어낼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남겼습니다. 그 감정은 정답을 알려주지 않지만, 우리가 더는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말보다 오래가는 감정이라는 게 있다면, 이 영화가 그런 감정을 심어준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