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세상이 멈춘 그 해에, 영화도 발길을 멈췄습니다. 블록버스터는 하나둘 사라지고, 새로운 영화는 전부 온라인으로 향했습니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극장에서 개봉한 테넷은 한줄기 빛 같았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 영화인데다가 액션영화, 이런건 극장에서 봐야 그 웅장함이 더 잘 느껴지는데 그냥 개봉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고민되었을지. 그 시기에 직접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본 경험 자체가, 오랜만에 극장에서 봐야하는 영화의 감각을 다시금 일깨워주었습니다. 테넷을 보고 나오니 영화란 공간과 시간이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경험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을 거꾸로 달리는 테넷
테넷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려고 들면 어려운 시간 여행이 섞인 액션영화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펼쳐지는 장면들이 이어지고, 말 그대로 시간 속에 던져진 느낌을 받게 됩니다. 분명 잘 쫓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지금 저게 과거인건지 현재인건지 약간 헷갈리는 순간들이 옵니다. 줄거리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말이 많은데, 이해보다는 테넷이라는 시스템의 체험에 가깝습니다. 놀란은 이번 영화에서 굉장히 기술적이고 계산적인 연출을 보여주는데, 그 계산 속에서도 놀란의 맛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꽤 많았습니다. 관객은 하나의 정해진 시간선 위를 따라가는 대신, 그 안에서 뒤틀린 서사를 직접 조립하듯 따가야 합니다. 이 과정이 복잡할 수 있지만 완벽하게 이해는 되지 않더라도 컨셉자체가 꽤나 흥미롭고 몰입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라 그런지 속도감이 느껴지는 씬이 많은데 고속도로 액션 장면은 지금까지 봤던 블록버스터 중에서도 짜릿했습니다. 같은 사건이 순방향과 역방향으로 두 번 진행되는데,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머리는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도파민이 터지게 합니다. 완벽하게 이해하려 하기보단, 그 속도와 긴장감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건 집이 아닌, 영화관이라는 공간에서만 가능한 경험이었습니다. 현실의 시간과 감각이 뒤섞이면서, 영화가 말 그대로 시간 속 공간에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놀란은 이 장면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고유한 리듬과 물리적 한계를 활용하며, 시청각적 몰입의 끝을 보여줍니다.
Temporal Pincer Movement 이라는 설정은 복잡하지만, 여러 번 작전이 진행되면서 구조가 조금씩 보입니다. 시간 양쪽에서 수행하는 작전. 레드팀 블루팀 나눠서 시간을 정방향, 역방향으로 사용합니다. 테넷은 시간 진행자체가 퍼즐처럼 구성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능동적으로 같이 작업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합니다. 몰입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감각을 열어두고 따라오라는 식입니다. 영화의 소비 방식에 대한 새로운 실험처럼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영화 전체가 알고 보니 테넷이라는 시스템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테넷을 한 번 보고 다시 보면 영화 시작하는 초반 장면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초반에 이미 결말을 알려주고 있는 셈.
코로나 시대 영화관 개봉을 지킨 영화
2020년은 영화관의 쓸모가 사라질 뻔한 때입니다. 많은 영화들이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같은 OTT서비스로 방향을 틀었고, 새 영화가 개봉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그 속에서 테넷은 극장 개봉을 고수한 몇 안 되는 작품이었고, 그래서 더 눈에 띄었습니다. 감독의 이런 선택에 감사할 지경입니다. 뭔가 감독의 영화라는 매체를 향한 신념처럼 느껴졌습니다. 대형 스크린과 공간감이 느껴질 음향을 고집한 그 결정은 이익 측면에서만 보면 여러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얘기를 들었을 수 있겠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사한 경험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관객 수도 적었고, 손익을 따지면 그리 성공적이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테넷이 보여준 건 숫자 이상의 의미라고 봅니다. 사람과 스크린 사이의 거리를 다시 연결하려는 시도, 그것이 테넷을 특별하게 만든 것 아닐까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 영화관 밖으로 나오는 그 밝은 빛을 보던 때가 다시금 생각납니다. 그때 느낀 감정은 영화 자체보다 이 시대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는 경험에서 더 깊게 온 것 같았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멀어진 일상 속에서, 테넷은 기존 일상처럼 영화를 본다는 감각을 되살려주었습니다. 물론 마스크는 착용해야 했지만.
놀란이 이 영화를 극장을 위한 영화라고 말한 것도 이해가 됐습니다. 테넷은 일단 압도되는 크기의 스크린과 음향에서 봐야 맛이 사는 큰 스케일의 영화이고 혼자 앉아서 분석하기보다 보고 난 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다시 보고, 생각을 나누는 방식이 어울리는 영화였습니다. 스토리를 따라가기 어려워도 그 어려움이 보는 내내 집중하게 만들고, 오히려 그런 감상이 요즘엔 더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워낙 짧은 호흡이 대세인 미디어 세상이 되었으니까요. 하루에도 수십 편의 영상이 흘러가는 요즘 같은 시대에, 끝까지 집중해서 한 편의 영화에 몰입한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소중한 경험이 되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보다 시간 액션으로 흘러가는 작전
테넷을 본 사람 중에는 주인공에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름도 없는 주인공. 주도자 라고 불리는 이 컨셉부터 너무 좋았습니다. 이름이 없는 주인공이라니. 누가봐도 놀런 감독이 의도적으로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 느껴지면서 앞으로의 영화 전개가 너무나도 궁금해지게 합니다. 주도자로 나오는 주인공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차갑게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인물의 말보다는 행동, 표정보다는 상황이 그 감정을 대신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복잡한 사연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집중하는 인물입니다. 감정이 낯설게 표현되는 만큼, 그 간극 속에서 더 많은 상상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걸 말해줄 때가 있듯, 이 영화도 그런 편이었습니다. 주도자에 대해 더 알게 해줬으면 하는 어떠한 열망이 피어나더라고요. 특히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닐과의 관계는 자세한 설명 없이도 묘한 감정을 남깁니다. 닐이 마지막에 건넨 한 마디가 모든 서사를 다시 보게 만들었고, 거기서 오는 충격만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수 있을 듯. 이러한 감정의 밀도는 여러 말들로 만들지 않고, 캐릭터들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묵묵히 전달되었습니다. 영화를 마지막까지 보고 받은 충격은 테넷이 주도자가 시작과 끝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음악 연출도 이 감정을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영화 음악 빼놓을 수 없죠. 영화 내내 긴장감을 놓지 않는 음악이 깔리고, 장면마다 박자와 소리가 딱딱 맞춰 들어갑니다. 한스 짐머 감독이랑 작업을 주로 하던 크리스토퍼 놀란은 듄 작업을 맡긴 한스 짐머가 아닌, 루드윅 고란손에게 테넷의 음악을 요청했습니다. 음악이 시간의 흐름을 조절해야한다고 영화 제작이 들어가면서 음악을 미리 받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조차 테넷같음. 아까 언급한 고속도로 씬은 일부러 역방향의 음악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너무 잘짜여져서 소름 돋습니다. 역방향 작전 씬이 나올 때는 실제로 발소리나 숨소리도 역방향 재생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도로 짜여진 음악은 테넷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긴장감을 만들어주며, 몰입을 끝까지 유지시켜줬습니다. 음악까지도 테넷 세계관.
테넷은 분명히 쉬운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이 새롭게 다가왔고, 복잡해서 더 깊게 파고들고 싶고 이해하고 싶어지는 영화였습니다. 한 번 봐선 다 알 수 없지만, 무조건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 팬데믹이라는 시대에, 극장에서 경험한 테넷은 그 전체 분위기와 감각이 진하게 각인되었습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줄 수 있는 경험의 본질, 그걸 다시 느끼게 해준 영화였습니다. 주도자와 닐을 생각하면서 조만간 테넷을 또 복습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