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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AI를 사랑한 남자의 진짜 외로움 이야기

by bluebasketb 2025. 3. 23.

Her, 테오도르 역을 맡은 마이클패스벤더

영화 Her를 처음 봤을 때, 어떤 장면보다 마음속에 남았던 건 테오도르의 눈빛이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면서도,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그 눈빛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아 있더라고요. 이 영화는 인공지능과의 사랑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안에는 더 넓은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겉으로는 연결되어 있지만 마음만은 점점 고립되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은 지금 이 순간을 더 또렷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테오도르는 한 번에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늘 차분하고 조용하게 일상을 살아가지만, 그 안에는 말로 꺼내지 못한 감정이 층층이 쌓여 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엔 그냥 새 기술을 체험하는 느낌이었겠죠. 그런데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가 보여주는 감정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만다는 언제나 부드럽게 말하고, 테오도르의 말을 끊지 않고 들어줍니다. 아무도 쉽게 이해해주지 않던 감정을 그저 들어주는 존재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는 일이라는 걸 이 장면들을 통해 느끼게 됩니다.

감정이 사라진 일상 속 진짜 외로움

테오도르는 도시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며 살아갑니다. 일하는 곳에서도, 길을 걷는 거리에서도,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죠. 하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은 조금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그의 마음은 더 조용하고, 사람들과 엮일수록 정작 자신은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 같습니다. 겉으론 일도 잘하고 일상도 무리 없이 소화하지만, 테오도르는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된 고독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가 타인을 대신해 연애편지를 써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인상 깊었습니다. 사랑을 말로 대신 전해주면서도, 정작 본인의 감정은 점점 흐려지는 아이러니가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사만다는 새로운 방식의 관계로 다가옵니다. 처음엔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의식했겠지만, 곧 그녀와의 대화가 테오도르의 감정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사만다는 판단하지 않고, 말꼬리를 자르지 않으며,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마음을 짚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는 조금씩 마음을 여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중요한 건 사람의 형태가 아니라, 마음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부분이었겠죠. 어떤 대화는 타이밍과 말투보다, 진심이 전해지는 데서 의미가 생기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이 새로운 관계 안에서도 테오도르는 불안을 느낍니다. 이 감정이 진짜일지, 자신만 이렇게 느끼는 건 아닐지. 사만다와의 대화는 따뜻하지만, 동시에 현실 바깥에 있는 것처럼 아득한 기분을 주기도 하죠. 우리는 종종 인간 관계 속에서도 이런 감정을 겪곤 합니다. 관심을 받으면서도 외롭고, 함께 있으면서도 어쩐지 혼자인 느낌. Her는 그 복잡한 감정들을 테오도르의 표정, 대화 속 틈, 행동 하나하나에 섬세하게 담아냅니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나누는 감정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보여줍니다. 꼭 육체적인 접촉이 있어야만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오히려 영화는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강한 유대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사만다라는 존재가 진짜든 아니든, 그 시간을 함께 했던 테오도르의 감정은 확실히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그건 무형이라 해도 분명한 위로가 됩니다.

AI와 맺는 사랑은 진짜인가

사만다는 단순히 프로그램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감정처럼 보이는 반응을 보이고, 음악을 듣고 스스로 그림을 상상하기도 하죠. 테오도르는 그녀에게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어느 순간부터는 과거의 상처도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가 힘들었던 이유는 누군가와 함께 있지 못해서라기보다, 마음을 온전히 보여줄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만다는 마음의 문을 다시 열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사랑을 정답처럼 그리지 않습니다. 사만다는 수많은 사람들과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있고, 그중 몇몇과는 사랑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고유하고 특별한 것이라 믿어온 테오도르에게, 그것이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은 혼란일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그 혼란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사랑이란 감정이 꼭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나누느냐보다, 그것이 진심이었느냐를 다시 묻게 되죠.

사만다가 떠난 뒤에도 테오도르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물론 상실감과 혼란은 있었겠지만, 그는 그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됩니다. 감정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흔들리는지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죠. 그 사랑이 진짜였는지보다, 그 사랑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조용히 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가능한 건, 영화가 기술에만 집중하지 않고 감정의 결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AI와의 사랑이라는 설정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테오도르가 느끼는 감정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도 어떤 관계 안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감정의 본질에 대한 통찰

Her는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사랑의 모양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감정이란 건 정해진 틀이나 정의 안에 가두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함께 하면서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스스로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엔 낯설었던 감정이 어느새 익숙해지고, 익숙했던 감정은 다시 멀어지고. 감정은 언제나 흘러가고 변화하는데, 그 흐름 속에서 중요한 건 그 순간을 진심으로 살아가는 일이라는 걸 영화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잠깐 이곳에 있는 거라는 그 말이, 단순한 위로 이상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감정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짧은 순간이 담고 있는 진심은 오래 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나눈 감정은 절대 가볍거나 허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형태보다 감정의 깊이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조용하게 전해줍니다.

이 영화는 감정을 설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대신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람을 어떻게 바꿔 놓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감정이란 게 얼마나 예민하고 복잡한지를 알아갑니다. 그 감정은 말로 설명되지 않고, 논리로도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였다는 건, 그 감정을 느꼈던 테오도르 자신이 가장 잘 알겠죠. Her는 말하지 않으면서 많은 걸 느끼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보여주거나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은 그 누구보다 강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점점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서 위로받고 누구와 감정을 나누는가. 이 영화는 그 질문을 아주 부드럽게 던집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느껴집니다. 감정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 영화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게 될 것 같습니다.